야화 16화

야화 16화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따뜻한 봄날씨가 계속되는 4월 초에, 남경(南京) 남문가(南門街)에 자리잡은 운래객잔(運來客棧)에 고시(告示)가 나 붙었다. 난치병 치료 은 십 냥(難治病 治療 銀十兩)이라는 방이 나 붙은 것이다.

 허여멀건 20대의 문약해 보이는 청년이 한 달 분의 방 값을 먼저 지불하고, 여러 명이나 되는 점소이(店小二)에게도 일일이 잔돈푼을 쥐어 주며, 자신을 찾아 오는 손님이 있다면 오전 중에는 객실로 안내를 하고, 객실에 없는 오후에는 남문가의 시장 바닥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환쟁이를 찾아 가도록 부탁을 해 두었다.

 거머리같은 취아선을 떼어 내기 위해서 얼굴 모습을 바꾼 천 풍림이었다. 오전 중에는 방안 가득 손바닥만한 접시를 늘어 놓고, 접시에는 그림물감을 풀어 방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는 그림은 춘화도(春畵圖)였다.

 화상(畵商)에서 빈 책자로 된 화첩을 사다가 거기에 그림을 그려 넣고 있었다. 남녀가 여러 가지 자세로 교합을 하고 있는 그림인데 털 한올 한 올까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아랫도리가 뻣뻣해지고, 그림에서 무럭무럭 요기가 피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색색의 화려한 의상을 풀어 헤치고 젖가슴과 아랫도리를 적나라하게 노출한 그림은, 그림 한 장 값만 해도 대단할 텐데 열 두 장으로 된 화첩을 모두 채우고 나면 제법 돈푼께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에는 남문가의 시장바닥 외진 구석에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초상화 은 십냥(肖像畵 銀十兩)이라는 깃발을 든 사내는 검은 장삼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의 하얀 얼굴이 돋 보이고, 문약한 환쟁이처럼 보이게 하였다.

 사슴처럼 큰 눈은 꿈을 꾸는 듯 신비로웠다. 안개가 낀 피안을 바라다 보듯, 보일 듯 보일 듯 하면서도 그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심연과 같아서 자꾸만 빨려 들어가는 신비한 눈이었다. 어찌 보면 놀란 사슴과 같은 눈인가 하면, 어찌 보면 꿈 속을 거니는 듯한 아련한 향수(鄕愁)를 담고 있는 눈이었다.

 사진이라는 것이 없는 시대였다. 오직 환쟁이가 족자에 그린 그림으로 자기 모습을 남길 수 밖에는 없었다. 장례나 제사 때 쓰는 영정(影幀)을 남겨 두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다. 그러나 제대로 초상화를 그리는 환쟁이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 값도 들쑥날쑥 하였다.

 은 한 냥이면, 한 사람이 한 달을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데, 은 십 냥 이라면 거의 일 년을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선뜻 손님이 나설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대로 그린 초상화라면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러니 비싸다고 만은 할 수 도없었다.  

 어느 고장에나 시장바닥에는, 그 시장바닥을 주름잡는 불량배가 있기 마련이다. 사흘째 되는 날 오후에 불량배 다섯 놈이 나타나더니 상인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시작 하였다. 힘 없는 상인들은 그들이 정한 금액만큼 다달이 돈을 뜯겨야만 했다.

 외진 구석에서 깃발을 들고 서있는 소년에게로 와서, 불량배들이 손을 내밀었다. 자리 값이 한 달에 십전(十錢)인데, 초상화 한장 그리는데 은 십 냥이면 자리 값을 50전은 내야만 한다고 했다.

 "이것 보시오 형님들... 사흘 동안 깃발을 들고 서 있었지만 손님 한 분도 오지 않았는데, 50전을 낼 돈이 어디 있겠소"

 "흐흐 흐흐... 우리가 눈 뜬 장님으로 보이느냐?... 운래객잔은 우리 소관이 아니라서 돈을 내라 마라 할 수는 없지만, 난치병을 치료하면 거기에서도 은 10냥을 벌 것 아니냐"

 "아직 소문이 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손님이 없습니다...형님들이 손님을 끌어 주면 50전을 당장 내도록 하겠습니다"

 "빤질빤질하게 생겨 먹은 놈이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려고 하는구나... 돈을 내던지 입고 있는 옷을 벗던지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

 "그럴 수는 없소...왕도(王都)에 법도 없단 말이오?... 갑시다 관가에 가서 시비를 가려 봅시다"

 "끅 끅 끅...세상 물정을 모르는 놈이구나... 이 놈아 법 보다 앞서는 것이 주먹이란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냐?"

 "낄 낄 낄... 주먹이라면 나도 한 주먹 하는데...은 10냥씩 들고 나를 찾아 와서 치료를 해 달라고 사정을 하기 전에 그만 돌아가는 것이 어떠냐?"

 "뭐야? 어디서 이런 놈이 다 왔어?..."

 말이 끝나기가 무겁게 주먹을 내질러 왔다. 나도 맞받아 쳐 갔다. 어이쿠 소리를 내며 주먹을 내지른 놈이 바닥에 쓰러지자, 나머지 네 놈이 품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나는 들고 있던 깃발을 휘둘러 손에 들고 있는 단도를 땅바닥에 떨어트리고, 그들의 명치를 사정없이 찔러 갔다.

 남들 보기에는 가볍게 찌른 것 같지만, 한 수에 구미(鳩尾)와 거궐(巨厥)을 동시에 점혈(点穴) 한 것이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풀 수 없는 점혈 수법이었다. 먹는 것을 계속 토하게 될 것이었다.

 "어떠냐? 환쟁이라고 무시 할 것이 아니다...떠돌이 생활을 하다 보면 한 주먹을 하게 되는 것이다...네 놈들이 살아 남으려면, 은 10냥씩을 가지고 와서 내게 치료를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 달을 살기 힘들 것이다"

 "웩...웩... 어디 두고 보자... 우리가 누군 줄 알 고...네 놈은 무사 할 것 같으냐?... 웩 웩..."

 다섯 놈이 아랫배를 움켜 쥐고 계속 토악질을 해 대며 물러 가자, 그 때야 구경꾼들도 흩어지기 시작을 하는데, 옆 자리에서 사기그릇을 팔던 노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 보며 훈수를 했다.

 "북문파(北門派)라는 5~60명이나 되는 떼거리들이라네...얼른 짐을 챙겨서 떠나도록 하게"

 "허허... 불량배들이 무서워서 꽁무니를 뺀다고 하면 사내 녀석이라고 할 수 없지요...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내의 기개도 중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을 때 이야기고, 죽고 나면 기개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정 못 당하겠으면 그 때가서 도망을 쳐도 늦지 않습니다... 염려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3~40명이 떼거리로 몰려 올 텐데 혼자서 상대를 하겠단 말인가?"

 "편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고, 없다면 혼자서라도 싸워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2~30명 되는 떼거리들이 몽둥이와 칼을 들고 몰려 들어 왔다. 혼비백산한 장사꾼들이 물건을 끌고 자리를 피했다. 요행히 구석진 외진 곳이라서 순식간에 공터로 변하였고, 떼거리들이 반원을 그리며 나를 둘러 쌓았다. 

 "흐흐 흐흐 흐...아직도 도망치지를 않았단 말이지?"

 "낄 낄 낄...기다리고 있었다네...한 사람이 열 냥씩 은전을 들고 나를 찾아 올 것인데, 도망을 치면 되겠는가?... 낄 낄 낄... 손님이 없어서 파리를 날리고 있었는데 자네들이 와 줘서 금년 일 년은 편히 먹고 살 것 같네...자 어두워지기 전에 시작 하세"

 싸움에는 기세라는 것이 있다. 싸움꾼은 이 기세를 민감하게 알아 챈다. 떼거리들의 기세가 주춤해졌다. 나는 거침 없이 깃발을 흔들기 시작 하였다. 무공을 모르는 불량배들 2~30명을 때려 눕히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모두를 때려 눕혔다.

 땅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리는 놈들을 하나하나 돌아가며 깃봉으로 여기저기를 찔러 댔다. 가볍게 찌르는 것 같았지만 모두가 격식에 따라 점혈을 한 것이다. 내가 아니면 풀 수가 없는 점혈이었다. 점혈을 풀지 않으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산 송장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북문파의 떼거리들이 7~80명쯤 된다고 들었는데, 손님이 너무 적게 왔구먼...다른 의원들을 찾아가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네... 평생을 병신으로 살던, 아니면 은 10냥씩을 가지고 나를 찾아 오게...오고 오지 않고는 자네들 마음대로 하게...낄 낄 낄..."

 구경꾼들은 너무 싱겁게 끝난 싸움판이 서운한 눈치였다. 구경거리는 불구경 물구경 싸움구경이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신나는 것은 싸움구경인데,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린 것이다.

 여기저기서 수근수근 수근거리는 데, 하루 사이에 내 별호가 십냥서생이 되고, 며칠 안가서 시장바닥뿐만이 아니라 남경에서도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름이 나면서 한 사람 두 사람씩 손님이 생기고, 날이 갈수록 소문에 소문이 퍼지면서 고객이 부쩍 늘어 났다.

 오후에는 잘 그려진 초상화 한 장을 들고 나가서, 그 초상화를 펼쳐 보이며 값을 흥정하였다. 그냥 먹물로만 그리는 초상화 값과 3색 5쌕 7색을 써서 그리는 초상화 값이 각각 달랐다. 

 또 얼굴만 그리느냐 상반신만 그릴 것이냐 아니면 전신을 그릴 것이냐에 따라 값이 달랐다. 총천연색으로 그리는 그림 값은, 한 장에 금 50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하루에 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며칠씩 걸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