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6화
야화 6화
야생에 찌든 소년의 저속한 말씨를 들을 때마다 소녀는 깔깔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야생의 때를 벗겨 나가는 것도 큰 일 중의 하나였다. 글도 가르쳐야만 했다.
"황 겨울이 되기 전에 산에서 내려 가자. 그리고 겨우내 글 공부와 무술을 수련하다가 내년 초 여름이 되면 다시 여기로 오자"
"우리 두 사람이 여기처럼 자유롭게 있을 수 있는 장소가 있어?"
"사실은 말이야...우리 식구는 모두 남경으로 이사를 가 살거든...그런데 여기 이 산 만큼 넓지는 않지만..."
북경에 있는 연왕부(燕王府)가 텅텅 비어 있고, 연왕부에 가면, 소년이 공부 할 수 있는 서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나처럼, 어디에서 굴러 온 개 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내가 연왕부에 가다니 될 법이나 한 소리냐?"
"내가 된다면 되는 것이야! 황(凰)은 나를 그렇게 믿지를 못해?!"
"나는 내 자신은 믿지 못할 망정, 봉의 말이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믿어"
"나는 황 없이는 하루도 못살 것 같은 데, 황은 봉 없이도 살 수 있어?"
"그런 말 하려면 차라리 나를 죽여"
"호호호... 그럼 나도 따라 죽으란 말이야? 여기에서처럼 마음 놓고 나를 안아 보지 못할까 봐서 그게 걱정이어서 그러지?"
"그럼 봉은, 내가 봉을 품에 안는 것이 싫어?"
"싫으면 안기겠어? 내가 생각 하는 것은 조금씩 야생의 때를 벗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를 바라는 것이야! 일시에 그러기는 어려운 것이니, 조금씩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을 배우면서, 내년 초여름이 되면 다시 이 곳에 와서 내가 배워야 할 야생의 생활을 배워 나가는 것이 어떻겠어?"
"봉이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나는 내 이름이 없다는 것부터가 자존심이 상해"
"황의 이야기를 듣고, 그 동안 내가 생각해 둔 이름이 있어! 성씨는 하늘아래서 태어 났으니 하늘 천의 천씨로 하고, 이름은 단풍 숲이라는 풍림(楓林)이라고 하면 어때?"
"천 풍림(天楓林)... 좋은 이름이고 마음에 든다. 사부인 누님이 들으면 좋아 할 것 같다"
"그 대신, 사부인 누님 생각은 서서히 잊어 버리고 그 자리에 내가 들어 앉았으면 좋겠다"
"아아...지금도 사부인 누님이 앉아 있던, 같은 자리에 봉이 앉아 있는 걸...세월이 지나면 봉, 아니 함녕이라고 했던가? 함녕의 자리가 더 크고 넓어질 꺼야"
"나는 풍림의 색씨이며, 언제나 풍림의 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돼?!"
"하하하...함녕이 내 짝이라는 것이 기쁘고 자랑스럽다"
북경 연왕부(燕王府)로 옮긴 지 며칠 되었다. 북경의 11월은 쌀쌀 하였다. 함녕 공주의 호위 무사라는 명목으로 공주의 침소 가 있는 옆 동을 거처로 정했다. 하란(夏蘭)과 춘매(春梅)라는 두 시녀가 모든 시중을 들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는 것 빼고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수 만 권이 넘는 서고에 들어가서 흥미를 끄는 서책을 고르는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주로 예절에 관한 서책과 의서(醫書)들이었다.
함녕은 잠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았고 책을 읽는 풍림 곁에 앉아서 가끔 모르는 것을 풍림이 물어 오면 가르쳐 주곤 하였다. 참으로 현명한 여인이었다. 결코 아는 체를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 들지도 않았다. 다만 모르는 것이 있어서 물어 오면 방그레 웃으며 조심스럽게 답할 뿐이었다.
풍림의 장점은 순수하다는 것이었다.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를 생각하지 않았다. 해면이 물을 빨아 드리듯 많은 것을 단시간에 쭉쭉 빨아들여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나갔다.
"풍림! 아바마마의 짐을 덜어 들이고 싶은데, 황의 생각은 어때?"
책을 읽다 말고 풍림이 책을 손에서 내려 놓더니 한참을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 함녕은 왜 무공을 배웠지?"
"무인의 집안에서 자라다 보니 어쩌다 배우게 되었고, 배우다 보니 재미가 있어서 배우게 된 것이야. 황은?"
"나? 나는 가르치니까 배워야 하는 것인가 보다 하고 배우기는 했는데, 힘들고 재미 없을 때는 수 없이 맞아 가면서도 고집을 피우고 배우지를 않았어! 그러다가 강한 짐승이 약한 짐승을 잡아 먹는 것을 보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꼭 배워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다음부터는, 사부인 누나가 머리를 절레절레 내 저을 정도로 열심히 배웠어! 나는 배운 것이 적어서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내가 무공을 배운 목적은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함녕을 만나는 순간 그 생각이 바뀌었어"
"어떻게?"
"사부인 누님이, 함녕의 섭안공과 섭영공을 조심하라고 귀가 아플 정도로 주의를 주었는데, 그것을 잊고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대에게 손을 내 밀었다는 것이야. 후일 그런 내 행동을 성찰하고, 의식을 했던 무의식이었든 그대에게 라면, 내 생명을 맡겨도 좋다는 것을 깨달았어.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그대에게 맡긴 생명인데, 그대가 하자는 것을 싫다고 할 수 있겠어?! 허나 말이야, 그것이 그대를 위한 것이라면 하기 싫어도 하겠지만, 남을 위해서는 내 자유를 희생할 수 없다는 말이야"
"호호호...고마워요! 나도 풍림을 위해서 라면, 기꺼이 이 목숨 하나쯤은 버릴 수 있어요. 그리고 풍림이 싫어하는 일을 강요 할 생각도 없고요"
"하하하...그 생각이 잘 못인 것이오. 그대나 나나 강요를 한다고 해서 할 사람들이오? 스스로 양보를 해서 할 수는 있지만, 강요란 통하지도 않는 어림 없는 말이란 것을 알아야 하오. 우리가 결정을 하고 우리가 하는 일이 아바마마에게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가면서 할 생각은 없고, 처음부터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손 끝 하나 움직일 생각은 없소"
"그럼 정의도 외면을 하겠다는 것인가요?"
"정의란 것이 무엇이오?...할 말은 아니지만, 건문제는 정사를 펼쳐 나가는데 숙부들이 걸림 돌이 된다는 생각에 숙부를 숙청 하였고, 숙부는 살아 남기 위해서 조카를 폐위 하였소? 어느 것이 정의요? 결국은 힘 있는 자가 정의인 것 아니겠소?"
"풍림! 언제 그런 생각을 다 하였지요?"
"서책은 그냥 모양으로 읽고 있는 줄 아시오? 지금은 함녕의 발 밑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몇 년 후에는 함녕과 대등한 자리에 서서 토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오"
"호호호... 나는 풍림이, 나를 선택해 준 것에 감사를 해요"
"흐흐흐...내가 그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설이 두 사람을 묶어 놓은 것 아니겠소? 그래서 말인데,잠부신공(潛斧神功)이 이루어 진 후에 몸에 이상은 없소?"
"왜 없겠어요!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몇 달 째 여인의 몸에 찾아 와야 할 적룡(赤龍)이 보이지를 않아서 수태를 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몸에 점점 음기가 강렬해져서, 잠부신공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답니다"
"나도 양기가 점점 강렬해져서 몸이 불구덩이 속에 들어간 것 같이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오"
"그래서 말인데 음양 합환대법으로, 서로의 음기와 양기를 교환하여 조화롭게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나 알고 하는 소리요?"
"호호호... 풍림 뿐만 아니라 나도 의원이란 말이에요. 내가 모른다면 누가 알겠어요"
"기를 순환하는 과정에서, 받아들인 쪽이, 받아들인 기를 되 돌려 주지 않으면, 기를 내 준 쪽은 빈 껍질만 남는 허수아비가 되어 죽어 간다는 것을 알고도 하는 소리요?"
"호호호... 이 갑자가 넘는 나의 내공을 그대가 가져 간다면, 아마 천하무적이 되겠지요. 무림을 집어 삼키려고 생각을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요. 나는 상관 없어요.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요"